베싸TV 영상 · 2023.05 · 17:20
아이의 감정을 무효화하는 말만 안 하면 됩니다
그게 뭐가 서운해' 같은 감정 무효화만 멈춰도 잘하고 있는 거예요. 공감은 진정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로 가치가 있어요.
자녀의 능력 하나를 골라 높여 주겠다는 신을 만났다고 해 볼게요. 인지 발달, 정서 발달, 신체 발달 중 어떤 걸 고르시겠어요? 저는 주저 없이 정서 발달을 고를 거예요. 정서적 기반이 튼튼한 아이가 커서 행복해질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걸 여러 연구 결과로 알고 있거든요. 심리상담사 조우관 님의 『초등심리사전』을 읽으며 정리한, 일상 소통 속에서 아이의 정서 발달을 돕는 방법을 풀어 볼게요.
하나만 고른다면 정서 발달이에요
우리는 똑똑하고 공부 잘하는 것, 100점 맞는 것이 숭상되던 산업화 시대에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그래서 무의식중에 아이가 공부를 잘했으면 하는 마음이 없지 않죠. 자라면서 계속 들어온 메시지가 우리 내면에 미치는 영향이 그만큼 커요. 하지만 조금만 더 공부해 보면 성적보다 정서적 기반이 얼마나 더 중요한지 금방 알 수 있어요. 지금 이 시대에도 행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을 조사해 보면 좋은 인간관계, 자존감, 정서적 안정이지 직업이나 소득, 학벌이 아니거든요. 지금처럼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 미래의 성공 공식은 지금과 완전히 다를 가능성이 높으니 앞으로는 더 그럴 거예요.
그러면 정서 발달을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요.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헷갈리지만, 정서 발달에서 가장 중요한 건 생애 초기 부모와의 일상적인 상호작용이라고 학자들은 입을 모아요. 부모가 잘 알고 옳은 방향으로 실천하기만 하면 아이의 정서 발달을 가장 잘 도울 수 있다는 뜻이죠. 정서 발달은 뇌 발달의 시기적 특성상 영유아기가 특히 중요해요. 부모와의 관계 속에서 정서 발달이 잘 이루어진 아이는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 훨씬 유능하게 준비된 상태로 인간관계를 만들어 가고, 성공적인 소통을 경험하며 리더십과 자신감이 생깁니다.
『초등심리사전』은 제목 때문에 큰 아이를 둔 부모를 위한 책인가 싶으실 텐데 전혀 그렇지 않아요. 소통 기술을 다루는 책은 대개 학령기 자녀를 둔 부모를 대상으로 해요. 사회정서적 문제가 본격적으로 드러나는 학령기에 부모가 "아차" 하고 찾아 읽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하지만 그 뒤에 담긴 아동 심리와 소통의 본질은 결국 하나라서, 원리를 알면 영유아에게도, 학령기 아이에게도, 심지어 배우자에게도 똑같이 쓸 수 있어요. 유네스코가 20년 전에 이미 사회정서학습(SEL)을 가르치라고 각국 교육부 장관에게 성명서를 보냈는데, 감정코칭이 아직 학교 교과목이 아니라는 게 저는 지금도 잘 이해가 안 돼요. 사람과 소통하는 기본 원칙을 가르쳐 주는 지식이라 육아에도, 부부관계에도 매우 유용하거든요.
"그게 뭐가 창피해"가 감정을 무효화해요
책은 서두에서 가정 내 소통을 강조해요. 가정은 사회의 가장 작은 단위죠. 집에서 부모와 건강하고 능숙하게 소통할 수 있는 아이는 사회에 나가서도 그렇게 할 수 있어요. 그리고 그 소통의 열쇠가 바로 감정이에요. 어떤 감정을 느끼기를 두려워하거나 느끼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 즉 감정과 친하지 않은 사람은 자기 감정도 타인의 감정도 직면하지 못하니 조절하거나 배려하기가 어렵거든요.
저는 어릴 적에 눈치를 보느라 말을 잘 못 하는 편이었어요. 말을 꺼냈다가 친구들이 비웃거나 놀리거나 무시할까 봐 겁이 났죠. 창피함이라는 감정이 두려웠던 거예요. 그런데 제가 창피함을 느꼈을 때 자주 들은 말은 "창피했구나, 그럴 수 있지"가 아니라 "그게 뭐가 창피해", "창피할 필요 하나도 없어"였어요. 그 시대 어른들은 그렇게 말해 줘야 아이가 상황을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다고 믿었죠.
이렇게 아이가 어떤 감정을 느낄 때 "이 상황에서는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는 게 맞아"라고 대응하는 걸 감정의 무효화라고 해요. 그 감정이 아이에게 유익하지 않다고, 혹은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겨서 없어져야 할 것으로 취급하는 거죠. "그게 삐질 일이야?", "별게 다 서운하다", "너 또 화났니?", "그렇게 슬플 일 아니잖아", "한 번만 더 삐지면 집에 갈 거야", "이제 그만 울어". 우리가 부모에게 배워서 무의식적으로 아이에게, 배우자에게 자주 하는 말들이에요. 사실 굉장히 독단적인 말이에요. "나는 같은 상황에서 너 같은 감정을 느끼지 않으니 너도 그래야 해" 하고 내 기준을 들이대며 상대의 감정을 무시하는 거니까요.
무효화가 반복되면 감정이 실타래처럼 꼬여요
무효화를 반복해서 겪은 아이는 부모가 그랬듯 자기도 그 감정을 무시하고 미워하게 돼요. 서운함이 올라올 때 밀어내거나 부정적으로 보지 않고 "너 또 왔니?" 하고 덤덤하게 그 감정과 같이 있으면서 다독여 조절해 내면 좋아요. 말로 표현하거나 적어 보거나 좋은 방향으로 바꿔 생각해 보는 나름의 전략을 쓸 수 있고요. 이게 감정과 친하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서운함을 미워하고 회피하면 최초의 서운함에 이차 감정이 덕지덕지 붙어요. 서운함을 또 느껴 버렸다는 죄책감, 이렇게 서운해하면 부모가 싫어할 거라는 슬픔, 아무도 공감해 주지 않는다는 좌절감, 왜 난 자꾸 서운할까 하는 자괴감. 감정이 너무 커지고 복잡해져서 본인도 이해하기 힘든 실타래가 되면 조절하기 어려워지죠.
책은 싱가포르 국립대 스테파니 리 박사의 연구를 인용해 경계선 성격장애 환자 대부분이 정서적 무효화를 겪으며 자랐다고 소개해요. 경계선 성격장애는 감정 조절을 굉장히 어려워하고, 타인에게 극단적인 기대를 품었다가 좌절되면 분노하고, 주변 사람을 자기 기대에 맞게 통제하려 하는 성격장애예요. 진단까지 가지 않더라도 주변에서 종종 보이는 성격 특성이죠. 친하다고 생각한 친구가 다른 친구와 가까워지는 것 같으면 버림받았다고 여기고, 서운함을 조절하기보다 분노나 의심으로 터뜨리는 식이에요. 그러다 보면 주변 사람이 하나둘 떠나가겠죠. 물론 저처럼 무효화를 조금 겪고 자랐어도 잘 자라는 사례가 훨씬 많지만, 무효화가 사고방식과 감정 조절력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 잘 보여 주는 사례예요.
감정코칭은 감정을 물어보고 받아 주는 거예요
대안이 감정코칭이에요. 감정을 무효화하거나 축소하지 말고, 공감하고 수용해 주라는 거죠. "그만 좀 삐져, 그렇게 삐지면 사람들이 싫어해"가 아니라 "친구가 그렇게 말해서 슬펐구나, 엄마 옆에 잠깐 앉아 있을래?"라고 말할 수 있다면 감정코칭을 할 줄 아는 부모예요.
아이가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아도 감정 대화로 이끌 수 있어요. 아이가 친구 집에 다녀와서 "친구 집이 우리 집보다 훨씬 크더라"라고 하면 부모는 복잡한 마음이 들죠. "비교하는 건 좋지 않아" 하고 훈계할지, "크다고 꼭 좋은 건 아니야" 하고 평가절하할지, "나도 큰 집 살고 싶다" 하고 하소연할지. 곰곰이 생각해 보면 다 썩 교육적인 답은 아니에요. 저자의 조언은 이거예요. "걔네 집이 훨씬 커서 너는 기분이 어땠어?" 그 말에 감정이 개입돼 있었는지, 있었다면 어떤 감정인지 그냥 물어보는 거예요. 아이는 아무 감정 없이 말했을 수도 있고 부모가 섣불리 판단했을 뿐일 수도 있어요. 부러움이 있었다면 담담하게 받아 주면 되고요. "그래, 부러웠구나. 집이 크면 좋은 점도 있지." 살면서 남이 부러울 일이 얼마나 많겠어요. 그 감정과 담담하게 친해지고, 다독이고, 흘려보낼 수 있게 돕는 게 가장 좋겠죠.
형제 갈등도 마찬가지예요. 둘째가 달려와 "형아가 물건 못 만지게 했어요" 하고 울먹일 때, 형을 불러 중재할 수도 있지만 꼭 그래야 하는 건 아니에요. 달려온 아이에게 먼저 집중해서 "그래서 네 기분이 어땠어?" 하고 감정 대화의 기회로 삼거나, 아직 어린 아이라면 "형아 것이 궁금했을 텐데 못 만지게 하니까 좌절스러웠겠다" 하고 감정을 먼저 읽어 줘요. 공감받고 기분이 나아진 아이는, 사실 그게 원했던 전부일 수도 있는데, 다시 놀이로 돌아가 스스로 소통을 시도하거나 부모에게 조언을 더 구하기도 해요.
공감했는데도 아이가 진정되지 않는다면
감정코칭의 첫 단계가 공감이라 책은 한 챕터 전체를 공감에 할애해요. 아이가 떼를 쓰거나 울거나 부모가 안 된다고 해서 좌절할 때 공감이 유용한 이유는, 부모가 감정을 알아주는 순간 흥분이 가라앉고 훈육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공감해 줬는데도 아이가 계속 울거나 더 화를 내는 경우도 있죠. 그럴 때 두 가지를 생각해 보시면 좋아요.
첫째, 공감은 감정을 진정시키는 도구가 아니에요. 공감해 줬는데 진정이 안 되니 효과가 없다고 판단해 버리는 부모님도 계세요. 하지만 진정 여부와 별개로 공감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어요. 아이에게 "네 감정은 정당해"라는 메시지를 주고 아이 편이 되어 주는 거니까요. 감정을 정당화받은 아이는 오히려 감정이 북받쳐서 울음이 더 커질 수도 있어요. 그래도 괜찮아요. 효과가 없다고 여기기보다 아이가 지금 이 감정을 제대로 경험하는 중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그 과정이 결국 감정을 잘 조절하는 밑바탕이 돼요. 아이를 진정시키는 게 부모의 책무가 아니에요. 감정은 아이의 것이에요. 감정과 친해지도록 감정과 함께 있을 기회를 주고, 도움이 필요할 때 받을 수 있게 열린 자세로 거기 있어 주시면 돼요.
진짜 공감은 말보다 몸에서 드러나요
둘째, 공감에도 진짜와 가짜가 있어요. 책은 심리학자 칼 로저스가 말한 심층적 공감과 그 반대인 표면적 공감을 이야기해요. 부모가 "슬프구나" 하고 형식적이고 기계적으로 공감하면 아이는 진짜 공감받았다고 느끼지 못할 수 있다는 거예요. 사람은 언어보다 비언어 신호에서 더 많은 정보를 받아들인다는 심리학 연구가 많아요. 정말 공감했을 때 무의식적으로 따라 나오는 몸짓과 표정이 없으면 상대는 "진짜 공감이 아니야"라고 느끼고, 어린아이도 눈치챌 수 있어요.
공감의 형태는 다양하고, 아이마다 공감받는다고 느끼는 방식이 조금씩 달라요. 말로 감정을 읽어 줬을 때 아이가 화를 내거나 잘 닿지 않는 것 같으면 말을 줄이고, 아이를 진심으로 아끼는 표정이나 포옹, 접촉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것도 방법이에요. 아이 말을 들으려고 몸을 앞으로 기울이거나, 지긋이 눈을 맞추거나,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모두 감정을 수용한다는 신호가 되죠. 물론 그 뒤에는 "이 상황을 타개해야지"라는 목적의식보다 "이 마음은 뭘까" 하는 진심 어린 관심이 있어야 하고요.
당장 아이 마음이 잘 이해되지 않아도 조급해하지 마세요. 감정을 무효화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잘하고 계신 거예요. 아이가 좀 더 크면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며 내면의 감정을 더 잘 이해할 수도 있고요. 아이의 감정에 진심으로 공감이 잘 안 된다면 그 이유가 뭘지, 내 안에 개인적인 상처나 남의 감정을 이해하기 어려운 심리적 이유가 있는 건 아닌지 찬찬히 돌아보시고, 가능하다면 상담도 받아 보세요. "아이 감정을 내가 당장 어떻게 해 줘야 한다"는 목적의식을 내려놓으면, 아이와 함께 천천히 감정 공부를 하며 성장한다는 더 큰 틀에서 여유 있게 걸어갈 수 있어요.
정리해 보면
- 인지·정서·신체 중 하나를 고른다면 정서 발달이에요. 행복한 사람의 공통점은 좋은 관계, 자존감, 정서적 안정이거든요.
- "그게 뭐가 서운해", "이제 그만 울어" 같은 감정의 무효화를 멈추세요. 내 기준으로 상대 감정을 무시하는 말이에요.
- 무효화가 반복되면 죄책감·슬픔·자괴감 같은 이차 감정이 붙어 조절하기 힘든 실타래가 돼요.
- 감정을 판단하기 전에 "기분이 어땠어?" 하고 물어보고, 담담하게 받아 주세요.
- 공감은 진정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로 가치가 있어요. 공감 뒤에 울음이 커져도 괜찮아요.
- 형식적인 말보다 표정, 포옹, 눈 맞춤 같은 비언어 신호가 진짜 공감을 전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