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싸TV 영상 · 2024.08 · 25:35
상상놀이를 해야 하는 이유, 그리고 자주 받는 질문 두 가지
상상놀이는 자기조절과 추상적 사고의 발판이에요. 지루하면 시간을 정하고 문제 상황을 만들고, 아이 주도는 지지해 주세요.
앞선 글에서 비고츠키 교육학 이야기를 했어요. 비고츠키 교육학에서는 영유아가 발달하면서 각 시기에 꼭 해야만 하는 활동을 '주요 활동'이라고 불러요. 다른 활동은 하면 좋지만 안 해도 되는 반면, 주요 활동은 발달에 필수적이라 아이가 충분히 할 수 있도록 어른이 환경을 만들어 줘야 한다고 했죠. 물론 어제까지는 사물 지향 활동을 하고 오늘부터는 상상놀이를 하는 식으로 딱 나뉘는 건 아니에요. 아이들은 로봇이 아니니까요. 큰 그림에서 초점이 천천히 옮겨 간다는 뜻이고, 오늘 어떤 놀이를 할까, 어떤 장난감을 들일까 하는 결정에 대강 참고하실 수 있어요.
이번에는 유치원생 시기의 주요 활동인 상상놀이를 조금 더 자세히 보려고 해요. "우리 아이는 아직 만 2세인데 상상놀이 안 해도 괜찮나요?" 하는 질문이 혀끝에 맴도실 텐데,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상상놀이가 주요 활동이 되는 건 만 3~6세지만, 상상놀이를 본격적으로 잘하기 위한 준비 기간은 유아기라고 부르는 만 1~3세예요. 그리고 상상놀이용 장난감이 더 필요한 시기도 사실 유치원생 시기보다 유아기고요.
몬테소리 육아를 하더라도 상상놀이는 챙기세요
상상놀이는 몬테소리 교육법에서는 다소 소외된 영역이지만, 비고츠키 학파에서는 매우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하는 영역이에요. 제 의견을 물으신다면 저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몬테소리 육아를 하더라도 거기에만 갇히지 말고 상상놀이에도 신경 쓸 필요가 있어요. 비고츠키뿐 아니라 여러 과학적 연구로 이점이 잘 밝혀져 있고, 상상놀이가 길러 주는 상상력, 감정조절, 사회성 같은 것들은 앞으로의 사회에서 몬테소리가 살았던 시대보다 훨씬 중요해질 거라고 보거든요.
상상놀이가 아이에게 주는 것
첫째, 상상놀이를 할 때 아이는 현재 수준보다 더 성숙한 정신 기능을 발휘해요. 뭔가에 집중하라고 지시했을 때 집중할 수 있는 시간보다, 놀이 안에서 '망보는 사람' 역할을 맡았을 때 더 오래 집중할 수 있는 거죠. 자기조절이나 규칙 따르기도 현실에서보다 놀이 안에서 훨씬 잘해요. 혼자서는 넘지 못하는 한계를 넘어서는 능력을 놀이에서 발휘하고, 그 과정에서 그 능력이 길러져요. 특히 비고츠키 이론에서 중시하는 자기조절력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가 많아요. 『정신의 도구』라는 책을 보면 비고츠키 학자들이 1940년대 아이들과 비교해 1970년대 아이들의 자기조절력이 많이 떨어졌다고 보고했는데, 아이들의 상상놀이 수준도 함께 낮아졌다는 걸 근거로 상상놀이 기회가 줄어든 탓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어요.
둘째, 상상놀이는 추상적 사고의 발판이에요. 막대기를 숟가락이라고 하고 먹는 놀이를 하려면, 숟가락이라는 구체적인 사물에서 '길쭉하고 손 대신 쓰는 도구'라는 추상적인 의미를 분리해 낼 수 있어야 해요. 뭐뭐 하는 척을 하면서 아이는 구체적인 사물에서 추상적인 의미를 뽑아내는 연습을 계속하는 거예요. 추상적 사고를 못 한다면 "사과 다섯 개 중 두 개를 먹었습니다" 같은 수학 문제를 풀 때마다 실제 사과를 가져다 놓고 먹어야 할 거예요. 사과가 진짜 있어야 생각할 수 있는 시기에서 손가락으로 대체하는 시기를 거쳐 머릿속에서만 할 수 있게 되는 것이 구체적 사고에서 추상적 사고로 넘어가는 과정이죠.
이 밖에도 내가 아닌 누군가가 되어 보면서 타인의 관점을 이해하는 조망 능력, 감정을 더 잘 이해하는 능력 같은 사회성이 발달하고 언어 표현력도 좋아져요.
왜 유아기부터 준비해야 할까
상상놀이는 어느 날 갑자기 뿅 하고 나타나는 게 아니라 어른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배워서 조금씩 나타나요. 그 배우는 기간이 주로 유아기예요. 아이마다 차이는 있지만 돌이 지나고 18개월이 지나면서 기초적인 형태의 역할놀이가 시작돼요. 예전에는 자동차를 그냥 굴리기만 했다면 이제 운전하는 척을 하고, 칼로 음식 모형을 자르기만 했다면 요리하고 먹는 시나리오를 더하는 식이죠.
비고츠키 교육학에서는 어른을 보고 모방하는 경험을 상상놀이 출현의 아주 중요한 요소로 봐요. 뭐뭐 하는 척하며 노는 걸 시범으로 보여 주는 어른이 주변에 아무도 없다면 아이의 척하기 놀이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거죠. 그래서 유아기 동안 어른은 상상놀이의 모범을 많이 보여 주고, 아이가 그 재미를 알아 갈 수 있도록 함께 척하며 놀아 줘야 해요. 아직 추상적 사고보다 눈앞의 구체적인 사물을 보고 생각하는 때라, 현실과 닮은 상상놀이 장난감을 활용해 자주 놀다 보면 조금씩 추상적 사고 수준이 높아지고 아이는 상상놀이에 능숙해져요. 그러다 만 3세 이후 본격적인 시기가 오면 별다른 장난감이 없어도 창의적이고 세련되게 상상놀이를 하게 되죠. 유아기 상상놀이는 냄비 장난감 같은 구체적인 사물이 중요한 반면, 유치원생 시기에는 "여기 냄비가 있다고 치자" 한마디로 대체될 만큼 추상화돼요.
모든 부모가 상상놀이 잘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건 아니에요. 어떤 점에서 좋은지 알면 놀다가 조금 더 의식적으로 척하기를 해 볼 수 있고, 아이들은 기본적으로 이걸 재미있어하기 때문에 금방 모방하고 일상 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시나리오를 만들어 가거든요. 요즘 여섯 살 다미와는 옷가게 놀이를 자주 하는데, 다미가 사장이 되어 무지개 옷과 바다 옷의 재질을 설명하고, 손님인 제가 9만 원짜리를 8만 원으로 깎아 달라고 하고, 다음 날 다시 찾아가 검정 옷 만 원과 겨울옷 3만 원을 더해 값을 치르고, 사장이 손님에게 가게를 팔고 공연하는 직업으로 바꾸는 식으로 이야기가 이어져요.
그런데 상상놀이가 너무 힘들고 어렵다고 느끼는 부모님도 계세요. 인스타그램에서 설문을 받아 보니 고민은 크게 두 가지였어요. 너무 단순하고 반복적이라 재미가 없다는 것, 그리고 아이가 대사와 상황을 다 정해서 시키기만 하는데 이걸 따라가기만 해도 되는지 모르겠다는 것. 아마 주로 유아기 아이를 키우는 분들의 고민일 거예요. 저도 그 시기에 살짝 했던 고민인데 아이가 크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졌어요.
너무 단순하고 반복적이라 재미가 없어요
맞아요. 저도 그랬어요. 미술 놀이나 블록놀이에 비해 아주 단순한 형태의 상상놀이에 어른이 즐겁게 참여하기는 쉽지 않더라고요. 다미가 크고 나서는 이런저런 방법으로 놀이를 다채롭게 끌고 가고 있지만, 어렸을 때는 솔직히 정신적으로 힘들 때가 있었어요. 어릴 때는 스토리 플롯 자체가 단순하고, 아이의 삶에서 비중이 크거나 관심사를 차지하는 한두 가지 에피소드를 계속 반복하고 싶어 하니까요.
긴 호흡으로 한 발짝 물러서서 보면 이 단순 반복이 계속 가지는 않아요. 아이는 그 에피소드에 들어 있는 역할의 규칙, 시나리오, 감정을 반복하며 완전히 익히고 나면 지루해져서 다른 놀이로 눈을 돌려요. 그래도 그동안 부모 입장에서 지루한 건 지루한 거죠. 저는 두 가지 방법으로 극복했어요.
첫째, 시간 한계를 정했어요. 2시 반에 놀이를 시작했는데 너무 힘들다 싶으면 '3시까지는 진짜 집중해서 놀아야지' 하고 마음먹는 거예요. 그렇게 아이의 놀이 욕구를 제대로 채워 주고 3시가 되면 제가 제안을 해요. "엄마 이제 이거 그만하고 싶어, 우리 그림 그리자", "블록으로 뭐 만들자" 하거나, 아이가 특히 좋아하는 촉감놀이 같은 걸 준비해 뒀다가 히든카드처럼 꺼내기도 하고요. 아이가 저항하면 "알았어, 그럼 이 놀이 한 번만 더 하고 다른 거 하는 거야" 하며 한발 물러서 협조를 얻어 내거나, 똑같이 놀고 싶은 마음을 알아주면서 장난스럽게 다른 놀이의 재미를 슬쩍 일깨워 줄 수도 있어요. 자기가 계속하고 싶어도 잠시 멈추고 다른 놀이에 참여하는 것도 나중에 친구들과 놀 때 꼭 필요한 능력이거든요. 다만 어릴수록 협조가 어려우니 부모가 아이의 관심사를 따라가 주는 빈도가 더 높으면 좋다고 생각해요.
둘째, 문제 만들기를 연습했어요. 아이가 "엄마 이거 먹어" 하며 요리를 건네면 보통 "냠냠 맛있다" 하고 먹죠. 그런데 이렇게만 하면 놀이 하나하나의 호흡이 짧아지고 무한 반복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놀이 시나리오 안에서 어떤 문제 상황을 만들 수 있을까 자꾸 고민했어요. "어, 이거 너무 매운데 혹시 소스 잘못 들어간 거 아니에요?" 하는 식으로 아이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만들어 주는 거예요. 저도 생각할 거리가 있으니 놀이가 덜 지겹고, 갈수록 문제 만들기도 늘고, 아이의 문제 해결력도 자라요. 이게 반복되면 아이도 똑같이 반복하기보다 조금씩 다른 상황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스토리가 흥미로워지고요. 그러려면 부모가 먼저 문제 만드는 모습을 충분히 보여 줘야 해요. 뜬금없는 문제를 던진다고 누가 평가하는 것도 아니니, 스토리의 큰 흐름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돌발 상황을 조금씩 만들어 보는 연습을 해 보세요.
아이가 대사까지 다 정해서 시켜요
어른 눈에 아이가 지나치게 주도한다고 여겨지는 경우죠. 이런 놀이를 나쁜 상상놀이라고 보는 분도 있는데 그럴 근거는 별로 없어요. 놀이 전문가들은 대체로 상상놀이에서도 아이 주도성의 중요성을 강조해요. 놀이라는 공간은 아이가 무엇이든 표현하고 욕구를 해소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이어야 하거든요. 놀이 안에서 모든 걸 통제하고 싶어 한다고 해서 현실에서도 놀이와 놀이 아닌 것을 구분 못 하고 통제 욕구가 강한 아이로 자라는 건 아니에요.
"마음대로 하고 싶어"라는 자율성 욕구는 만 1~3세에 지극히 당연한 발달 단계예요. 아이는 일상에서 이 자율성을 자주 좌절당하죠. 부모가 마음대로 하게 두지 않으니까요. 반면 놀이 안에서는 안전하게 자율성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고 부모는 이를 지지해 줄 수 있어요. 놀이 안에서라면 아이가 공격적인 시나리오를 만들거나 부모에게 나쁜 역할을 시키는 경우에도 지지되어야 해요. 놀이 심리학자 로렌스 코헨의 책을 참고해 보시면 놀이를 어른 중심으로 보는 시각이 많이 풀릴 거예요.
제 생각에 아이가 대사까지 지정해서 시키는 건 머릿속에 표현하고 싶은 시나리오와 상황이 명확하게 있기 때문이에요. 놀이라는 자기만의 영화의 감독이 되고 싶은 거죠. 다미도 어릴 때 그랬는데 저는 웬만하면 그대로 따라가 줬어요. 아이가 커 가면서는 시키는 대로 하기도 하지만 기회가 되면 슬쩍 문제를 하나 발생시키거나 이야기를 조금 비트는 시도도 했고요. 저항할 때는 개의치 않고 그냥 원하는 대로 해 줬어요. 지금 여섯 살인 다미와 놀 때는 큰 그림은 다미가 하고 싶은 방향으로 가지만, 그 안에서 주도권은 저와 다미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둘이 함께 놀이를 만들어 가요. 다미도 100% 자기가 주도하는 것보다 그게 더 재밌다는 걸 알거든요. 다른 사람의 인풋이 들어와 조금 다른 방향으로 갔을 때 "싫어"보다 긍정적인 호기심이 드는 쪽으로 자라나는 것이 사회성이 발달하는 과정이에요.
그러니 특히 자율성 욕구가 폭발하는 만 1~3세에 아이가 주도하려는 놀이에 어른의 색안경을 끼고 좋은 놀이, 나쁜 놀이로 구분하지 마세요. 다만 아이가 주도하는 대로 앵무새처럼 따라가는 게 너무 힘들고 재미없다면, 내 한계는 여기까지라고 정하고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시면 돼요. 상상놀이 영역은 놀이 선생님 같은 도움을 받고 나는 아이와 더 즐겁게 잘할 수 있는 놀이를 하는 방법을 택할 수도 있죠. 그래도 유아교육 분야에서 상상놀이의 중요성은 근거가 충분하니 아예 포기하지는 않으셨으면 해요. 공부할 때 국어·영어·수학은 필수라고 여기듯, 내가 못 하면 다른 방법으로 어떻게 채울까 해결책을 찾아보는 거예요. 상상놀이를 중시하는 유치원에 보낼 계획을 세울 수도 있고, 만 3세까지는 버틴 뒤 상상놀이를 함께 재밌게 할 친한 친구를 찾아 줄 수도 있어요.
정리해 보면
- 상상놀이는 만 3~6세의 주요 활동이지만 준비 기간은 만 1~3세이고, 이때 어른이 척하기 놀이의 모범을 보여 줘야 해요.
- 상상놀이는 자기조절력과 추상적 사고, 타인 조망, 언어 표현력을 키워요.
- 반복이 지루하면 집중해서 놀 시간을 정하고, 그 뒤에 다른 놀이를 제안하세요.
- "너무 매운데요?"처럼 아이가 해결할 문제 상황을 놀이 안에 만들어 주세요.
- 아이가 대사까지 정해 시키는 놀이도 자율성의 표현이니 지지하되, 내 한계 안에서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