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지금 듣고 있는 AMI 오리엔테이션 과정의 과제로 제출한 에세이이다.

지금 내가 키우고 있는 고양이는, 3개월 정도 되었을 때 가정분양받았다. 지금은 만 4세를 넘는 성묘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 고양이는 내가 데려왔던 아기인 시절과 다 자란 지금 행동 패턴에 큰 차이가 없다. 아기였을 때는 내가 흔들어주는 장난감에 좀더 격하게 반응했지만 지금은 좀 심드렁하다는 것정도의 성격적인 차이를 제외하면 대체로 이 고양이는 어릴 때나 지금이나 비슷해 보인다. 먹고, 집안 곳곳을 순찰하며 자기 영역을 확인하고, 편안히 누워서 쉬다가 자고, 배변하고, 가끔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사냥 욕구를 충족하는 일과의 반복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느낀 것은, 인간의 어린 아이와 어른은 삶의 목적 자체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었다. 아이 동반 가족이 많이 오는 식당에 가 보면 이런 차이는 확연하다. 어른은 앉아서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눈다. 아이들은 끊임없이 돌아다니며 탐색하려고 한다. 어른에게 있어서는 전혀 의미 없는 행동인, 숟가락통에서 숟가락을 다 꺼낸다거나 휴지를 뽑는다거나 반찬 그릇에 손을 넣어 반찬을 만져보려는 행동에 집착한다. 아이들은 마치, 이 주변의 모든 것을 만져보고 조작해보는 것이 삶의 목적인 것처럼 행동한다.

왜 동물은 아이와 어른이 비슷하게 행동하는데, 어른은 아이와 어른이 이렇게 다르게 행동할까? 그 답을 곰곰히 생각해 보면, 아이에 대한 새로운 존경심이 생겨난다. 제대로 기능하는 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동물에 비해, 엄청나게 많은 발전이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엄청나게 많은 뉴런들이 연결되며 뇌를 구성해가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들은 근육을 사용해 이 세상과 상호작용하면서 뇌를 완성시켜 나간다. 진화하는 과정에서, 이렇게 세상과 상호작용하려는 의지가 떨어지는 아이들은 뇌가 충분히발전하지 못해, 인지 능력이 떨어지거나, 사회성이 떨어지거나, 등등 기타 이유로 무리에서 도태되거나 이성에게 선택받지 못했을 것이다. 살아남은 자들의 후손인 우리는, 이 세상과 상호작용하려고 안달난, 즉 호르메로 가장 충만했던 아이들의 후손이다.

(*호르메 : 아이들 내면의 충동, 생명력)

호르메는 아이들로 하여금 손으로 조작하도록 명령한다. 아이들의 ‘흡수’는, 몇몇 어른들이 오해하는 것과 같이, 가만히 앉아서 눈으로 흡수한다고 달성되지 않는다. 많은 어른들은 아이가 가만히 앉아서 찬찬히 무언가를 눈으로 보고 있을 때, 집중력이 좋고 뭔가를 많이 배우고 있다고 믿는다. 다미도 뭔가를 열중해서 보고 있을 때 ‘참 집중력이 좋다, 잘 배운다’고 어른들께 칭찬을 받은 일이 많았다. 책 속의 이미지와 글들을 보면서 눈으로 정보를 습득하는 것이 익숙한 어른의 관점에서는 그렇게 보여질 수도 있다. 하지만 정보를 이렇게 눈으로만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른보다 할 일이 훨씬 많은 아이들에게는, 즉 뇌를 발달시켜야 하는 아이들에게는 다소 효과가 충분하지 않은 방법이다. 아이들은 눈 뿐 아니라 손도 함께 사용해야 한다. 호르메가 그렇게 명령한다. 손과 눈 모두를사용해서 이 세상과 상호작용할 때, 아이가 눈으로 보는 이미지에 의해 뉴런이 발화되고, 아이가 손으로 만지고 조작하는 행위에 의해서도 뉴런이 발화된다. 뇌과학에서 이런 표현이 있다. “Neurons that fire together wire together”. 함께 발화된 뉴런들은 연결되어 일종의 정보가 지나다니는 통로, 즉 시냅스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시냅스가 생성되는 것 그 자체가 뇌발달을 의미한다는 것쯤은, 요즘 엄마라면 몬테소리를 들어보지 않았더라도 어디선가는 들어봤을 것이다.

앉아서 눈으로만 보는 방식에 비해, 눈과 손을 함께 사용해서 상호작용하려는 방식은, 아이에게는 뇌발달이라는 목적 달성에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지만, 어른들에게는 종종 받아들여지기 힘들다. 뇌발달이 완성된 어른은 더 이상 이런 방식으로 상호작용하지 않으며, 호르메를 가지고 움직였던 영유아기의 기억은 어른의 머리 속에 더 이상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어른이 아이의 이러한 행동을 진심으로 공감하긴 쉽지 않다. 아이는 어른과 전혀 다른 원리로 움직이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아이를 이해해주고 공감해주는 첫걸음이다.

나보다 먼저 출산한 친구가, 식당에서 뭐든 다 만지려고 하는 아이를 보며 “육아는 정말 힘들다”고 불평했는데, 친정 엄마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니가 우리 집 애들 중에 제일 심했어." 지금은 전혀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 어른인 우리들도, 어렸을 때에는 호르메로 가득 차 뭐든 다 만지고, 주무르고, 탐색하려고 난리쳤던 시절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이 호르메는 인류가 생후 아직 미성숙한 뇌를 열심히 성장시키기 위해 진화의 과정을 통해 심어놓은 동력원이라는 것을 이해하면, 아이를 좀더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조부모님들은 아이를 둘, 셋 키우면서 ‘애들은 다 그렇다’라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기에 좀더 차분하게 아이의 이런 탐색 욕구와 흡수 정신을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지만, 육아가 처음인 초보 부모에게는아이의 이런 행동들이 이해가 되지 않거나 버겁게 느껴질 수 있다. 아이의 행동에 의미를 한 겹 두 겹 씌우고 다시 바라보면 아이는 완전히 다르게 보인다. 친구의 아이가 숟가락통에서 숟가락을 다 빼려고 했을 때(물론 요즘 같은 전염병 시국에는 이런 방식의 탐색을 허용하긴 어렵지만), 당시에 몬테소리를 공부했다면 나는 이런 말들을 해줄 수 있었을 것이다.

“아이가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뇌발달을 위한 아주 강한 충동이 내면에 있어서야. 더 잘 진화한 형태의 인류일수록 이 충동이 강해. 아이가 탐색하려고 열심히 할수록, 뇌발달에 더 유리한 개체구나, 라고 결론 내릴 수도 있어. 지금 OO이의 머릿속에 누군가가, 저건 네가 충분히 경험해보지 못한 대상이야! 흥미롭지? 가서 만지고 꺼내봐! 라고 아주 강하게 명령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좋아. 뇌발달이라는 아이의 현재 삶에서 가장 중요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물론 현실 친구와 이런 이야기를 민망하지 않게 나누는 좋은 방법에 대해서는, 좀더 고민해봐야 할 것...)

육아는 정말 힘들다. 어른의 관점으로만 바라본다면 이해가 안 되는 것들 투성이다. 아이는 어른과 다르다는 것의 본질적인 의미를 이해하면, 부모는 좀더 너그러워지고 아이의 욕구들을 존중할 수 있게 된다. 몬테소리를 공부할 때 유아 교육으로 시작했다가 세계 평화로 끝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일까? 결국에 아이를 존중하는 것은, 다름을 인정하고 상대방에게 공감하는 것이고, 이것은 세계 평화를 이루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들 중 하나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