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싸TV 영상 · 2023.10 · 16:22
스스로 조절하는 아이들의 특징, 말 잘 듣는 아이와는 다릅니다
자율감·유능감·관계감이 채워진 아이가 스스로 조절하는 아이로 자라요. 말 잘 듣는 아이가 육아의 최종 목표는 아니에요.
놀이터에 가려고 나왔는데 아이가 편의점에 가겠다고 떼를 씁니다. 어떤 부모는 "안 돼, 편의점 안 갈 거야"라고 딱 잘라 거절하고 아이 손을 끌고 놀이터로 향해요. 어떤 부모는 "편의점을 보니까 가고 싶어졌구나. 그런데 곧 저녁 시간이라 간식은 안 되고, 먹을 수 있는 건 보리차뿐인데 그래도 들어갈래?" 하고 설득하죠. 첫 번째 아이는 부모 눈치를 보다가 포기하고 따라가고, 두 번째 아이는 조금 떼를 쓰다가 부모가 굴하지 않자 보리차를 사 먹기로 하고 편의점에 들어갑니다. 둘 중 어떤 아이가 자기조절을 잘하는 아이일까요. 그리고 장기적으로 어떤 아이가 자기조절을 더 잘하는 아이로 자랄까요.
"엄마 아빠 말씀 잘 들어"가 육아의 목표일까요
다미네 유치원에는 생일을 맞은 친구에게 반 친구들이 그림을 그리고 뒷면에 하고 싶은 말을 적어 책으로 만들어 주는 풍습이 있어요. 다미가 이 책을 좋아해서 자기 전에 자주 읽는데, 친구들의 편지에 생각보다 자주 등장해서 저는 좀 낯설었던 문장이 있었어요. "엄마 아빠 말씀 잘 들어, 다미야." 할머니 할아버지가 자주 하시는 말씀인가 싶기도 했죠.
위의 두 아이 중 말씀 잘 듣는 아이는 첫 번째 아이일 거예요. 부모가 "안 돼" 하면 "네" 하는 아이. 한국 사회에서 전통적으로 긍정적으로 보는 모습이죠. 부모 입장에서는 편할 수 있지만, 옆에서 "안 돼"라고 말해 줄 부모가 없을 때도 스스로 조절을 잘할까요? 그렇지 않아요. 왜 말 잘 듣는 아이가 육아의 최종 목표가 아니어야 하는지, 자기결정성 이론으로 설명해 볼게요.
자율성 지지 육아를 짧게 복습하면
자율성 지지 육아는 앞선 글에서 긴 시리즈로 다뤘어요. 영아기에는 아이의 탐색 활동을 최대한 지지하고 허용하는 방향으로 키우는 게 좋고, 유아기에는 세 가지가 핵심이었죠. 아이와 부모의 욕구가 부딪힐 때 강압이나 보상, 협박 같은 통제적인 방식보다 윈윈 전략으로 자발적인 협조를 얻어 내기. 부모가 나서서 해 주기보다 스스로 끝까지 해내서 성공 경험을 하도록 믿고 기다려 주기. 감정과 욕구를 인정해 주는 감정코칭에 관심 갖기.
이 방법들은 제가 만들어 낸 게 아니라, 전 세계 학자들이 많은 데이터로 입증해 온 자기결정성 이론을 바탕으로 해요. 이 이론은 사람에게는 나이와 상관없이 세 가지 기본적인 심리적 욕구를 채우려는 강력한 동기가 있다고 봅니다. 자율감, 유능감, 관계감이에요.
자율감, 유능감, 관계감이 자기조절의 뿌리예요
아기가 매사에 "싫어"를 외치는 것은 자율감을 느끼고 싶어서예요. "난 이거 할 수 있어"를 증명하려고 뭔가를 계속 시도하면서 엄마를 돌아보는 건 유능감을 느끼고 싶어서고요. 화장실에 가서 보이지 않는 엄마를 목이 터져라 부르는 건 엄마와 계속 연결되고 싶은 관계감 때문이죠. 이 중 자율감과 유능감은 어릴 때 자율성 지지 육아 안에서 가장 잘 채워지고, 관계감은 반응육아 안에서 잘 채워져요.
생애 초기에 이 세 가지 욕구가 잘 충족된 아이들은 서서히 자율적인 자기조절에 동기가 생긴다고 해요. 자율감이 충만한 아이는 누군가 외부에서 "안 돼" 하며 조절해 주기를 원하지 않고 혼자서 스스로를 조절하고 싶어 해요. 유능감이 충만한 아이는 스스로 조절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서 자기조절을 두려워하지 않고 시도하죠. 관계감이 충만한 아이는 혼자 해 보다 실패해도 늘 지지해 주는 부모가 있다는 확신으로 더 자신 있게 시도하고, 좋아하는 부모가 기대하는 성숙한 모습에 부응하고 싶어 해요.
사실 아이가 태어났을 때는 세 가지 욕구가 모두 0에서 시작해요. 그래서 조절을 거의 100% 부모에게 의존하죠. 울면 흔들어 줘야만 울음을 멈추잖아요. 그런데 부모와의 관계 속에서 이 욕구들이 채워지면서 스스로 조절하는 비율이 점점 늘어나요. 외부 조절이 내부 조절로 바뀌는 이 과정을 자기결정성 이론에서는 내면화라고 부릅니다.
나이가 든다고 저절로 채워지지는 않아요
부모가 어떤 방식으로 육아하느냐에 따라 같은 나이여도 이 욕구의 충족 수준은 편차가 커요. 자율감·유능감·관계감이 충만한 네 살 아이는 "나는 도움 없이도 내 목소리를 조절할 수 있어, 그렇게 하고 싶어"라는 마음으로 실내에서 조용히 말해 보려고 나름대로 노력합니다. 반면 세 욕구가 부족한 네 살 아이는 엄마가 "조용히 해"라고 외부에서 도와줄 때까지 그냥 크게 이야기해요.
스스로 목소리를 조절하려면 자기 목소리 상태에 계속 주의를 기울여 모니터링해야 하고, 크게 내고 싶은 충동이 일어도 억제하려고 주의력을 상당히 써야 하죠. 이 과정에서 실패도 하고 성공도 하면서 주의를 더 능숙하게 다루는 능력이 자연스럽게 길러져요. 자율성 지지 육아를 받은 아이는 일상 곳곳에서 자기조절을 스스로 시도하면서 주의력 조절 연습을 하게 되는 거예요. 이렇게 길러진 주의력은 자기조절에 대한 유능감을 높이고, 그 유능감이 다시 자기조절의 동기를 높이는 선순환이 만들어집니다.
조절에는 다섯 단계가 있어요
부모로서 우리는 아이가 조절을 했는지 안 했는지, 드러나는 부분에만 신경을 많이 써요. 중간고사를 앞두고 게임하고 싶은 마음을 참고 공부했다면 만족하고, "조용히 해"라고 하니 금방 조용해졌다면 만족하죠. 하지만 아이가 어떤 동기로 조절했는지까지 봐야 해요. 보상을 얻으려고 공부한 건지, 스스로 세운 목표를 이루고 싶어서인지, 성취감을 느끼고 싶어서인지, 그 과목이 재미있어서인지요.
자기결정성 이론은 조절의 동기가 얼마나 자율적인지를 중요하게 보고, 조절을 크게 다섯 가지로 나눠요. 외적인 쪽에서 내적인 쪽으로 순서대로 살펴볼게요.
- 무동기: 조절하려는 동기 자체가 없는 상태예요. "공부해서 뭐 해"죠. 기대하거나 이끌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이렇게 돼요.
- 외적 조절: 엄마 아빠가 하라고 하니까, 시험 잘 보면 뭘 사 준다니까 공부하는 것. 이유가 공부 자체와는 무관해요. 초등학교·중학교 때 많은 학생이 이 정도가 아닐까 싶어요.
- 주입된 조절: 내적 조절의 첫 단계예요. 시키지 않아도 하긴 하지만 이유가 완전히 자기 것은 아니에요. 엄마가 맨날 공부하라고 하니 놀면 마음이 불편한 것, 상사가 출장 가서 없어도 하루 종일 놀면 불편한 것 같은 내적 압박이죠. "나 고3이니까"가 여기에 많을 거예요.
- 통합된 조절: 더 자율적인 단계예요. "꼭 서울대에 가고 싶어", "엄마의 기쁜 얼굴을 꼭 볼 거야"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시키지 않아도 열심히 하는 것. 다만 동기는 여전히 공부 자체가 아니라 성공이나 주변의 인정에 있어요.
- 내적 동기에 의한 조절: 가장 강력한 자율적 조절이에요. 공부가 좋아서, 재미있어서 하는 것. 성취감, 지식욕을 채우는 재미, 성장하는 즐거움이 좋으면 알아서 계속하고, 게임에 빠질 일도 별로 없겠죠. 공부가 게임과는 다른 종류의 만족감을 주니까요.
아이는 내면화를 거쳐 점점 내적인 쪽으로 옮겨 가는데, 이 내면화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바로 선생님이나 부모의 자율성 지지라는 것이 밝혀졌어요. 통제적인 방식으로 대하면 아이는 자꾸 외적 조절 쪽으로 가고, 자율성을 지지하면 내적 조절 쪽으로 가요. 수영 코치가 통제적인 사람일 때와 자율성을 지지하는 사람일 때 아이들이 수영을 계속하는 동기가 달랐고, 결과적으로 자율성을 지지하는 코치 밑의 아이들이 더 오래, 더 즐겁게 몰입해서 수영을 했다는 연구가 있어요.
"어쨌든 조절했으니 됐다"가 아니에요
아이가 스스로를 조절하는 건 중요해요. 부모 말에 따르고, 친구를 배려하고, 울고 싶어도 참고, 재미없거나 좌절스러워도 진득하게 노력해야 하는 일이 많죠. 그런데 어쨌든 조절했으니 됐다가 아니라, 가급적 내적인 동기로 조절할 수 있게 하는 게 중요하다는 거예요.
어린아이들은 "젤리 줄게" 같은 보상이나 "엄마 화낼 거야"라는 말에 쉽게 협조해요. 엄마가 화낼까 봐 불편한 마음에 동생에게 얼른 사과하고 안아 주기도 하죠. 얼핏 보면 자기조절을 잘하는 것 같아요. 하고 싶은 대로 밀어붙이지는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우리 애는 엄마 화낸다 하면 바로 그만둬, 자기조절력이 좋아"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어요. 하지만 이런 외적 조절은 아이가 커 가면서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외적 조절은 조금씩 내적 조절로 대체되어야 해요. 그런데 부모가 계속 통제적인 태도로 대해서 일상의 자잘한 과제들을 주로 외적 조절로 하게 되면, 내적 조절 능력이 자랄 기회가 사라져요. 내면화가 진전되지 않으니 누가 계속 말해 주고 조절해 주지 않으면 스스로 생각해서 행동하기 어려워지죠. 내부 기준이 바로 선 아이가 아니라 남의 눈치를 보며 혼나지 않을 방향으로만 행동하는 아이가 되는 거예요. 실제로 자율성 지지를 잘한 부모의 아이들이 높은 수준의 자기조절력을 발휘한다는 실증 연구가 여럿 있어요.
또 하나, 내적 조절 능력이 잘 자라지 못하면 나중에 공부나 운동처럼 재미없어도 꾸준히 해야 하는 과제, 그러니까 더 지속적인 자기조절력과 주의력이 필요한 과제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 있어요. 내적 조절을 할 줄 아는 아이들은 더 길게 몰입하고 끈기 있게 하는 반면, 외적 조절을 주로 하는 아이들은 어려움 앞에서 금방 포기하고 주의 지속력이 떨어졌어요. 사람은 외적 동기보다 내적 동기로 과제를 할 때 주의력을 다루는 뇌 부위를 더 활발하게 쓴다고도 해요. 억지로 시켜서 할 때보다 스스로 할 때 주의력도 학습 효율도 좋아진다는 거죠.
성과에 집착하지 않아도 되는 시기부터 시작하세요
어떤 부모가 자기주도적으로 공부하는 아이를 원하지 않겠어요. 스스로 안 하니까 조급한 마음에 보상이든 강압이든 쓰게 되는 것도 이해가 돼요. 하지만 통제적인 환경에서 자란 아이가 갑자기 자율적으로 공부하길 바라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에요. "우리 아이가 공부를 못해도 상관없다"는 마음가짐 없이는 자율성을 주기 힘든 게 사실이죠.
그래서 어릴 때부터 시작하셨으면 좋겠어요. 아이의 성과에 집착하지 않아도 되는 시기부터 자율성을 지지하는 습관을 만들어 가는 것이, 나중에 마법처럼 자기주도 학습자로 만들려고 하는 것보다 훨씬 쉬운 길이에요. 자기조절을 잘 못하는 아이를 지시와 통제, 보상으로 말 듣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는 쉽습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이 방법은 진짜 내적 조절의 성장을 막고 주의력이 발달할 기회를 빼앗을 수 있어요. 지금 부모로서 쉬운 선택이 장기적으로 어떤 효과를 가져오는지 기회가 닿는 대로 한 번씩만 더 생각해 보세요. 지식은 신념이 되고, 신념은 행동을 바꿉니다.
정리해 보면
- 말 잘 듣는 아이가 육아의 최종 목표는 아니에요. 부모가 옆에 없어도 스스로 조절하는 아이가 목표예요.
- 자율감·유능감·관계감이 채워질 때 아이는 스스로 조절하고 싶은 동기를 갖게 돼요.
- 자기조절을 스스로 시도하는 과정에서 주의력이 길러지고, 그 주의력이 다시 자기조절의 동기를 높여요.
- 조절했는지만 보지 말고 어떤 동기로 조절했는지 보세요. 통제는 외적 조절로, 자율성 지지는 내적 조절로 이끌어요.
- 성과에 집착하지 않아도 되는 어린 시기부터 자율성을 지지하는 습관을 만드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