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영어를 가르치면 한국어를 못하게 될까 봐 걱정되신 적 있으신가요. 앞선 글에서 외국어를 일찍 노출해 주면 좋은 이유를 설명드렸는데, 오늘은 조기 노출을 망설이게 하는 가장 큰 이유, 바로 '조기 외국어 노출이 모국어 습득을 방해한다'는 가설이 사실인지 짚어볼게요.

바이링구얼 환경의 아이들이 말이 늦다거나 여러 언어의 단어를 섞어 쓰는 모습을 보면서, 모국어 습득이 안정되기 전에 외국어에 노출되면 아이가 혼란스러워한다는 주장이 생겨난 것 같아요.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유는 두 가지예요.

바이링구얼과 모노링구얼, 말하기 속도는 다르지 않아요

첫째, 바이링구얼 아이와 모노링구얼 아이 사이에 언어 발달 속도 차이는 없습니다. 말하기 능력은 아이마다 편차가 상당히 큰 발달 영역이에요. 기준은 연구마다 다르지만, 한 연구에서는 미국 기준으로 다섯 명 중 한 명이 언어 지연 상태에 있고, 정상 범위 안에서도 6개월 이상 편차가 흔하다고 해요. 그래서 아이 말이 느리다고 걱정하는 부모님 중, 바이링구얼·멀티링구얼 환경에 있었던 아이라면 그 노출을 원인으로 판단하시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하지만 여러 연구는 한목소리로 두 그룹의 언어 발달 속도에 별 차이가 없다고 말합니다. 바이링구얼 아이들이 두 단어를 붙여 말하는 시기가 조금 늦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여전히 정상 범위 안이고, 두세 단어를 연속해서 말하기 시작한 뒤로는 모노링구얼 아이들과 비슷한 속도로 모국어 문법을 쌓아 간다고 해요. 실제로 언어 지연을 겪을 확률도 두 그룹이 비슷합니다.

앞선 글에서 언어는 여러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씀드렸죠. 돌 전까지는 각 언어의 소리 정보를 뇌에 입력하며 기반을 다지는데, 아기는 이 소리를 처리하는 시스템을 언어별로 따로 만든다고 해요. 몇 개월 안 된 아기도 음소거 상태에서 입 모양만 보고 모국어와 외국어를 구분할 수 있고, 태어날 때부터 두 언어에 노출된 바이링구얼 아기는 생후 4개월만 돼도 두 소리 처리 시스템 중 하나를 골라 가동할 수 있대요. 즉 아주 어릴 때 노출되더라도 모국어 배선과 외국어 배선은 따로 진행되기 때문에, 아이는 한국어를 들을 땐 한국어 배선을, 영어를 들을 땐 영어 배선을 가동할 수 있어요. 그러니 외국어 노출이 모국어의 음성학적 처리를 방해하지 않습니다.

문법은 나이대별로, 어휘는 노출량의 문제

모국어 문법 지식은 돌 이후 발달해 6~7세면 어느 정도 완성돼요. 이 논문은 문법 지식을 5세 이전의 '이른 지식', 5세 이후의 '늦은 지식', 6세 이후의 '아주 늦은 지식'으로 나눴는데요, 5세까지 배우는 기본 구조인 '이른 지식'은 두 그룹이 거의 같은 속도로 습득했어요. 바이링구얼 아이가 하루 언어 경험의 절반만 모국어에 써도 이 수준은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다는 뜻이죠. 반면 5세 이후, 특히 '아주 늦은 지식' 영역에서는 바이링구얼 아이의 속도가 더 느리고 차이도 벌어졌다고 해요. 다만 문법 습득은 10대 이후까지도 가능하니 조금 늦어진다고 걱정할 부분은 아니고, 모국어가 뒤처지지 않길 바란다면 5세 이후로는 모국어 비중을 더 높여 주시면 됩니다.

어휘는 바이링구얼 아이들이 결과적으로 약해질 수 있는 영역이에요. 성인 바이링구얼과 모노링구얼의 모국어 유창성을 비교한 연구에서, 둘의 차이는 질적 차이라기보다 알고 있는 단어 수의 차이였고 동사보다 명사에서 차이가 컸어요. 언어별 노출 시간이 적다 보니 단어 노출 횟수도 적어지기 때문인데, 모노링구얼 아이가 한국어 단어 1,000개를 안다면 두 언어를 배우는 아이는 한국어 500개, 영어 500개를 아는 식이 돼요. 다만 어휘는 평생 습득 가능하고, 한국에 거주한다면 학교 수업과 친구 관계 덕분에 격차가 훨씬 줄어들 거라 이 부분이 조기 노출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요소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언어를 섞어 쓰는 건 혼란이 아니에요

둘째, 아이들이 겪는 언어 혼용은 바이링구얼 아이에게 자연스러운 현상이에요. 외국어 노출이 많은 아이가 두 언어의 단어를 섞어 쓰는 모습을 보면 부모님이 걱정하실 수 있는데, 여러 연구에 따르면 이런 '코드 믹싱'은 여러 언어를 배우는 아이들이 흔히 거치는 정상적인 발달 단계예요. 어린 아이는 아직 세상을 표현할 만큼 어휘력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모르는 단어를 다른 언어에서 빌려 오는 등 모노링구얼 아이는 쓸 수 없는 전략과 실험을 해보는 거예요. 혼란으로 볼 필요는 없고, 각 언어 체계가 자리 잡아 가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진다고 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아이들은 언어의 음률적 특징을 단서로 어떤 언어를 들었는지 판단해 처리 시스템을 고를 수 있어서, 우려와 달리 진짜 언어 혼란은 잘 일어나지 않아요. 특히 외국어에 일찍부터 노출된 아이는 각 언어를 구분하는 능력을 더 잘 유지해서 혼란이 올 가능성이 더 적어져요. 소리를 끈 상태에서 입 모양만 보고 언어를 구분하는 능력은 4개월 때는 두 그룹 모두 가능하지만, 18개월 때는 바이링구얼 아이만 가능하다고 해요.

그래도 모국어는 중요해요

정리하면, 바이링구얼 아이는 모국어와 외국어의 처리 시스템을 뒤섞지 않고, 여러 언어를 듣는다고 해서 혼란을 겪지도 않아요. 그러니 모국어 걱정 때문에 외국어 노출을 꺼릴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모국어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에요. 언어는 세상을 이해하고 배우는 도구이자 사고의 틀이라, 아이는 혼잣말로 정보를 정리하고 문제를 해결하기도 하고, 감정이나 생각을 표현하며 정서적으로 안정되기도 하고, 부모님과의 소통으로 상황에 더 잘 대처하기도 해요. 누구나 결국 모국어를 배우게 되지만, 더 이른 시기에 수준 높은 모국어를 갖출 수 있다면 외국어라는 스킬 못지않게 아이의 발달에 강력한 힘이 됩니다. 그러니 어릴 때 외국어에 노출시켜 주는 건 좋지만, 모국어 발달을 저해하지 않는다는 전제는 지켜야 해요.

부모님이 외국어에 유창하지 않은데도 일상에서 모국어 비중을 아예 빼거나 크게 줄이면, 부모님의 어휘력과 표현력이 외국어에서는 제한되기 쉬워서 아이가 접하는 언어 환경 자체가 풍부하지 않을 확률이 높아요. 5세까지는 언어 경험의 절반을 외국어로 채워도 모국어에 큰 영향이 없지만, 그보다 더 줄었을 때는 아직 연구로 밝혀진 바가 없어요. 딱 잘라 기준을 드리긴 어렵지만, 한국어를 주 언어로 가져가려면 전체 언어 경험의 절반 정도는 한국어로 유지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또 6~7세 이후부터는 모국어 유창성이 외국어 학습에도 중요한 요소가 된다고 해요. 그러니 5세부터는 모국어 수준을 높이는 데 신경 쓰시고, 외국어 노출 비중이 과해지지 않도록 살펴 주세요.

정리해 보면

  • 바이링구얼과 모노링구얼 아이의 말하기 발달 속도에는 뚜렷한 차이가 없어요.
  • 5세 이전 기본 문법은 노출량이 적어도 잘 따라가지만, 5세 이후 고급 문법은 모국어 노출을 더 늘려 주세요.
  • 아이가 언어를 섞어 쓰는 코드 믹싱은 혼란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발달 단계로 받아들이세요.
  • 5세까지는 언어 경험의 절반을 외국어로 채워도 괜찮지만, 그 이상 줄이는 건 권하지 않아요.
  • 외국어 노출은 모국어 발달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 일찍 시작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