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싸TV 영상 · 2020.12 · 16:13
영유아 외국어 노출, 언제 시작해야 할까
노출은 이르면 이를수록 좋지만 결정적 시기는 언어 영역마다 다르고, 핵심은 사람과의 직접 상호작용이에요.
지금이 우리 아이 외국어 노출의 최적기인데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이런 불안을 갖고 계신 분들이 많으실 것 같아요. 어릴 때 외국어 학습을 시키는 게 좋은지 아닌지는 학계에서도 오랫동안 의견이 분분했던 주제라, 아이가 언어를 어떻게 습득하고 유지하는지, 어떻게 이중언어·삼중언어가 가능한지를 이해하지 않고는 부모님께 도움이 될 결론을 내리기 어려워서 저도 공부를 정말 많이 했습니다.
노출과 수업, 언어를 배우는 두 가지 방법
대부분의 학자들은 외국어 노출 시기에 대해 어릴수록 좋다는 데 대체로 합의하고 있어요. 갓난아기가 모국어를 배우듯 노출만으로 자연스럽게 언어를 익히는 방식과, 학교에서 배우듯 수업으로 익히는 방식은 서로 다른데요, 특히 5세 이전 아이들은 언어를 배울 때 주로 노출을 통해 배우고, 나이가 들수록 노출로 배우는 능력은 줄고 수업으로 배우는 능력은 늘어나요. 그래서 어른은 외국어를 그냥 들려주기만 해서는 귀가 트이는 효과가 제한적이라고 해요.
나이가 들면 자발적으로 영어 수업을 듣고 싶어 하는 마음도 잘 생기지 않아요. 초등학생에게 영어를 수업 방식으로 가르치려 하면 부모님의 상당한 노력이나 강요가 동반되기 쉽고, 그러다 실패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제가 대학생 때 초등학교 2학년 아이의 영어 과외를 한 적이 있는데, 청담동의 한 영어 학원에 다니던 이 아이는 영어가 너무 싫어서 숙제를 안 해 가는 바람에 숙제를 도와줄 과외 선생님으로 채용된 거였어요. 책상에 앉아 영어책을 읽는 것도, 억지로 영어로 말해야 하는 것도 너무 싫다던 아이의 모습이 아직 기억나요.
나이 들어 외국어를 배운 사람은 어릴 때 배운 사람보다 실력 편차가 큰데요, 흥미나 동기 수준뿐 아니라 수업이나 교사의 질, 성격, 환경 등 다양한 변수의 영향을 더 크게 받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자연스러운 언어 습득이 가능한 어린 나이에 외국어에 노출시켜 주는 쪽이 성공률이 높습니다.
'결정적 시기'라는 가설
아이의 뇌가 완성되기 전에 외국어를 접하게 해줘야 한다는 이야기, 한 번쯤 들어보셨을 텐데요. 관련된 개념이 '결정적 시기 가설'이에요. 어린 뇌는 유연해서 언어를 받아들이는 데 더 적극적이고, 뇌가 성숙해지는 특정 시기 이후에는 아무리 공부해도 원어민 수준에 이르기 어렵다는 가설입니다. '가설'이라는 단어를 아직 쓰는 데서 알 수 있듯 명확한 근거로 입증된 건 아니고, 관련 연구는 지난 삼사십 년간 이어져 왔지만 아직 명쾌하게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어릴 때 미국으로 이민 온 사람과 좀 더 커서 이민 온 사람의 성인이 된 후 영어 유창성을 비교한 논문들을 보면, 연구마다 4세, 5세, 6세, 7세, 10세, 12세, 13세 등 저마다 다른 나이를 결정적 시기로 제시하고 있었어요.
언어의 영역마다 다른 결정적 시기
왜 이렇게 결과가 다양할까요. 첫째, 언어는 여러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에요. 말소리를 구분하는 능력, 단어의 의미를 아는 어휘력, 문법 구조를 이해하고 적용하는 문법 지식처럼 여러 능력이 단계적으로 필요한데, 각 영역이 특히 잘 발달하는 시기는 저마다 달라요. 한 논문에서는 음성학적 영역의 발달은 사춘기 무렵까지, 문법 지식 습득은 비교적 이른 시기까지, 의미를 이해하는 능력은 십대 중반까지 주로 이루어지고, 어휘 습득은 평생 가능하다는 연구 결과를 인용하고 있었어요. 그러니 연구마다 발음, 어휘, 문법 중 어디에 무게를 두는지에 따라 결정적 시기가 다르게 나올 수밖에 없는 거죠.
둘째, 실험마다 대상의 개인차를 완벽히 통제하기 어렵기 때문이에요. 그렇다고 '사람마다 다르다'는 말씀만 드릴 수는 없으니, 여러 논문을 읽고 나서 제가 내린 결론은 두 가지예요. 외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려면 늦어도 10~12세 정도에는 학습을 시작해야 하고, 원어민과 비슷한 말투와 억양을 갖추려면 6세 이전에 학습을 시작하는 게 좋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 시작하면 좋을까
먼저 말과 문법 구조 이야기부터 해볼게요. 언어를 이해하고 표현하는 데 가장 기반이 되면서도 결정적 시기를 두고 유독 논란이 많은 영역인 데다, 보통 수십에서 수백 명을 대상으로 한 다른 연구들과 달리 온라인 퀴즈 형식으로 60만 명 이상을 조사해 개인차의 영향을 줄인 연구가 있어서 이걸 기준으로 볼게요. 이 연구에 따르면 언어의 기초적인 구조를 습득하는 결정적 시기는 17~18세 무렵 닫히는데, 외국어를 마스터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생각하면 10~12세 정도에는 학습을 시작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봤어요. 이 시기는 해외에 거주하지 않고 국내에서 외국어를 배우더라도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하고요. 다만 아이가 외국어에 노출되는 시간이 적은 편이라면 이보다 더 일찍 시작하는 게 좋겠죠.
발음과 억양은 조금 다릅니다. 관련 논문은 많지 않지만, 6세 이전에 노출된 아이들은 대부분 외국인 티가 나지 않는 발음과 억양을 구사하는 경향이 있고, 12세 이후에 노출되면 대부분 외국어 티가 나는 발음과 억양을 갖게 되며, 6~12세는 개인차가 있다고 해요. 다만 발음과 억양이 이미 굳어진 어른이라도 제대로 훈련하면 원어민과 비슷한 수준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는 연구도 많아서, 발음을 결정적 시기로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정리하면 말의 구조와 문법을 기준으로 10~12세에 시작해도 충분히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고, 원어민 같은 발음까지 원하신다면 6세 이전에 노출해 주시는 게 좋겠습니다.
뱃속에서부터 시작되는 언어 노출
특히 12개월 이전에, 음원이나 영상이 아니라 사람이 직접 외국어로 말해주는 걸 들려주면 외국어 습득에 일종의 부스터 효과가 있다는 연구 결과들이 있어요. 네이처지에 실린 한 논문에 따르면 아기는 태아 때부터 엄마가 말하는 언어를 들으면서 모국어의 강세나 길이 같은 음률적인 특징에 익숙해진다고 해요. 그래서인지 영어권 신생아와 한국인 신생아의 울음소리를 비교해 보면 억양의 음향적인 측면에서 약간 다르다고 하더라고요.
그렇지만 이 시기 아기들은 아직 세상의 모든 언어의 소리를 받아들이는 능력을 잃지 않은 상태예요. 반면 어른은 모국어에 없는 외국어의 미세한 소리 차이를 구분하는 걸 어려워하는데, 첫 1년 동안 우리 뇌가 모국어라는 시스템을 가장 잘 이해하도록 스스로를 최적화하기 때문이에요. 선택과 집중을 통해 모국어를 가장 효율적으로 습득하고, 이를 발판 삼아 세상을 더 잘 살아가기 위한 거고요. 실제로 7.5개월 때 모국어를 외국어보다 더 선호하는 아기일수록 이후 모국어 습득이 더 빨랐다는 연구 결과도 있는데, 생애 초기에 모국어를 들으며 뇌가 어떤 소리에 집중해야 하는지를 파악하면 모국어 배선 과정을 더 빨리 끝낼 수 있는 거죠.
6~12개월 사이에 이런 모국어 배선이 거의 완료되는데, 이 시기를 지나면 외국어의 미세한 발음을 구분하는 게 어려워져요. 반면 이 시기에 모국어와 외국어를 함께 노출해 주면 두 언어의 배선이 함께 진행되기 때문에, 모국어 자극과 외국어 자극 모두 아이에게 의미 있는 정보로 남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첫 1년 동안 아기는 들은 말소리 중 그 언어에서 자주 쓰이는 소리에 대한 정보를 뇌에 입력해 신경 네트워크를 만들어요. 한국어 신경 네트워크가 형성된 뒤에 "사과 먹을래"라는 말을 들으면 '사과'라는 단어를 구분해 내고 관련 신경도 함께 켜지지만, 영어에 노출된 적이 없다면 "apple"이라는 말을 들어도 그 단어를 구분하지 못하고 언어 처리도 일어나지 않아요. 그러니 12개월 전에 외국어에 노출된 아이는 이후 그 언어를 들었을 때 정보를 더 적극적으로 흡수할 수 있는 뇌를 갖게 되는 거예요.
12개월이 지났다면 이미 늦은 걸까
여기까지 설명드리면 두 가지가 궁금해지실 것 같아요. 하나는 '그럼 12개월이 지나면 늦은 건가' 하는 질문인데, 사실 여기에 직접적인 답을 드리기는 어려워요. 이 내용을 오랫동안 연구해 온 패트리샤 쿨 박사님의 논문을 살펴보고 이메일로 의견을 여쭤보기도 했지만 명확한 답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제 생각에는, 적어도 생애 첫 3년 동안은 뇌가 아직 유연하기 때문에 모국어 배선이 이미 완료됐더라도 외국어에 꾸준히 노출시켜 주면 외국어 배선이 추가로 만들어질 수 있을 것 같아요. 속도는 12개월 전보다 좀 더 느릴 수 있지만요. 실제로 한 논문에서는 7개월에서 33.5개월 사이의 스페인어권 아이들에게 4개월 동안 매일 1시간씩 미국인과 상호작용할 시간을 줬는데, 모든 아이들의 영어 이해력과 말하기 능력이 상당히 향상됐다고 해요. 12개월이 지나더라도 3세 정도까지는 노출을 시켜 준다면 어느 정도 부스터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 하나는 '얼마나 노출시켜 줘야 하나'인데요, 생후 9개월 된 영어권 아기들에게 5주 동안 한 번에 30분씩 12번, 중국인과 상호작용할 시간을 줬더니, 태어나서부터 9개월까지 계속 중국어에 노출됐던 아이들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중국어 소리 구분 능력을 갖게 됐다는 연구도 있어요. 즉 12개월 이전이라면 총 6시간 정도의 짧은 노출만으로도 언어 배선이 가능했다는 거예요. 이런 단기 노출 효과는 12개월이 지나면 좀 작아지지 않을까 하는 게 제 개인적인 추측이고요. 그리고 이런 외국어 노출은 실제 사람과 직접 상호작용할 때 효과가 있고, 영상이나 녹음으로 들려주는 건 안타깝게도 같은 효과가 없다고 해요.
정리해 보면
- 외국어는 노출을 통해 배우는 능력이 큰 어릴 때 시작할수록 유리해요.
- 결정적 시기는 언어의 영역(발음·문법·어휘)마다 달라서 한 살로 딱 잘라 말하기 어려워요.
- 자유로운 구사를 원한다면 늦어도 10~12세, 원어민 같은 발음을 원한다면 6세 이전에 시작하세요.
- 12개월 이전에는 짧은 시간이라도 사람과 직접 상호작용하며 노출해 주면 도움이 돼요.
- 12개월이 지났어도 3세 무렵까지는 꾸준한 노출로 어느 정도 부스터 효과를 기대할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