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가족과 외식을 했어요. 한쪽이 소파처럼 길게 이어진 테이블이었는데, 식사를 마친 다미가 그 소파 위를 맨발로 걸어가다가 넘어져서 물컵을 엎질렀어요. 식탁은 엉망이 됐고, 다미는 턱을 테이블 언저리에 부딪혀 울기 시작했죠. 저는 다친 곳부터 살핀 다음 엎질러진 걸 수습하고, 혼내는 말투도 너무 부드러운 말투도 아닌 중립적인 말투로 "다미야, 소파는 앉는 곳이야"라고 말해 줬어요. 그런데 뭔가 기분이 불편했습니다.

혼내지 않으니 눈치가 보였어요

집에서 했을 법한 대처를 그대로 했을 뿐인데 왜 불편했을까 곰곰이 생각해 봤더니, 식당에서 다미를 혼내지 않은 저를 다른 사람들이 마땅히 할 훈계도 안 하고 아이를 감싸는 무책임한 부모로 볼 것 같아서였어요. 아이가 잘못했을 때 혼내는 건 부모의 의무이자 권리처럼 느껴지죠. 시대가 바뀌어 "맞을 짓을 했으면 맞아야지" 하는 분은 이제 별로 없어도, 부모는 때때로 아이를 혼내야 하는 존재라는 생각, 혼내지 않으면 버릇이 나빠지고 문제 행동을 일삼게 된다는 생각은 우리 머릿속 어딘가에 여전히 깊게 뿌리내려 있어요. 실제로 제가 인스타그램에서 설문을 했더니 80%의 베프님이 부모는 아이를 종종 혼내야 한다고 답하셨거든요.

혼내지 않으면 아이는 잘못된 행동을 계속하고, 혼내면 점점 안 하게 될까요? 가족에게 민폐를 끼친 다미에게 저는 행동의 결과를 책임지게 하려고 꾸짖고 벌을 줬어야 할까요? 이 질문을 다시 생각하게 해 준 책이 컬럼비아대에서 임상심리학을 공부하고 뉴욕에서 수많은 가정을 상담해 온 셰팔리 차바리 박사의 『깨어있는 양육』이에요. 우리가 자라온 시절의 낡은 권위주의가 마음속에 무의식적으로 남긴 잔재를 끄집어내 마구 흔들어 대는 책이에요. 부모는 아이에게 교훈을 주어야 하는가, 순종하는 아이는 정상인가, 반항하는 아이는 훈육이 필요한가, 부모가 정한 규칙은 항상 정당한가. 읽다 보면 반감이 드는 분도, 큰 깨달음을 얻는 분도 있을 텐데, 어느 쪽이든 육아는 조금 아니면 많이 달라질 거예요.

"훈육하지 말라"는 말의 진짜 뜻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이를 훈육하지 말라는 굉장히 도발적인 이야기를 해요. 벌써 반감이 올라오시죠? 그런데 한국 육아에서 말하는 훈육, 특히 어린아이를 대상으로 한 훈육과는 톤이 좀 달라요. 영어의 discipline은 사전적으로 "순종하지 않는 아이를 교정하기 위해 처벌 등을 활용해 규칙에 따르게 만드는 일"이에요. 반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훈육은 아이에게 올바른 행동 양식을 가르쳐 주는 더 넓은 개념이죠. 그러니 한국 기준으로 보면 차바리 박사는 훈육 자체가 아니라 훈육 방식 중 특정한 영역을 부정하는 셈이에요.

훈육은 당연히 필요해요. 아이를 전혀 훈육하지 않는 부모는 무책임한 부모죠. 부모는 행동의 한계를 끊임없이 가르쳐 주며 어떤 행동이 사회적으로 알맞은지 알려 줘야 해요. 아이는 그걸 모르니까요. 차바리 박사가 지적하는 건 이런 이상적인 훈육이 아니라 현실에서 일어나는 훈육이에요. 그는 이론가가 아니라 육아가 어렵다고 느끼는 평범한 부모들을 상담소에서 만나 온 임상심리상담가라, 보통 부모의 무의식에 어떤 생각이 있고 그게 어떤 행동으로 나타나는지 잘 알아요. 책 속 사례를 보면 미국이든 한국이든 보통의 부모가 하는 훈육은 크게 다르지 않아요. 저희 부모님과 시부모님이 저와 남편에게 그대로 쓰셨던 방법이기도 하고요. 아이의 어떤 행동에 부모가 정한 결과를 지워서 "그 행동은 하면 안 되는구나" 하는 교훈을 주는 방식, 쉽게 말해 혼내기와 벌주기예요.

혼내기와 벌주기는 행동주의 시대의 잔재예요

이런 방식은 2000년대 이전 심리학의 주류였던 행동주의 심리학의 기본 개념에서 나왔어요. 핵심만 보면 사람도 동물과 비슷한 원리로 다룰 수 있다는 관념이에요. 바라는 행동을 하면 상을 주고 아니면 벌을 주면, 강화하고 싶은 행동은 강화되고 없애고 싶은 행동은 사라진다는 거죠. 아이가 거짓말을 하면 무서운 말투로 "너 잘못했어 안 했어" 하며 죄책감을 느끼게 하고, 좋아하는 TV를 못 보게 하고, 용돈을 깎아요. 이게 반복되면 "거짓말을 했더니 나쁜 일이 생기네"라는 경험을 기억해서 충동을 조절하게 된다는 게 이 논리의 핵심이에요. 이 단순한 논리가 굉장히 많은 가정에서 훈육의 주된 무기가 됐죠. 어릴 때 잘못하고 나서 부드럽게든 엄격하게든 혼나거나 벌을 받지 않은 분은 별로 없을 거예요.

우리는 자라온 방식을 편하게 느껴요. 그래서 잘못한 아이를 혼내는 게 맞는 방향처럼 느껴지고, 혼내지 않으면 무책임하고 허용적이고 권위 없는 부모가 되는 것 같죠. 아이를 울리더라도 훈계하는 용기 있는 부모, 아이의 볼에 눈물 자국이 있고 아이가 옆에서 찌그러져 있어도 마음이 아픈 걸 참고 엄한 얼굴을 유지하는 흔들리지 않는 부모. 마음속에 이런 부모가 좋은 부모라는 막연한 무의식이 있지 않으신가요? 그렇게 아이를 통제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은 낡은 행동주의와 권위주의 시대의 잔재예요.

여기서 벗어나는 방법 중 하나는 유체이탈을 하듯 바깥에서 그게 정말 맞는지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려고 노력하는 거예요. 이런 방식이 옳다고 느끼실 거라는 것도, 그게 나쁘다고 말하는 저자와 저에게 반감이 드실 거라는 것도 알아요. 하지만 "부모는 뭘 해야 한다"는 자동적인 전제를 잠깐 내려놓고, 처음 만난 외계인을 다루는 법을 배우는 사람처럼 접근해 보시길 바라요. 저자는 훈육이 필요 없을 뿐 아니라 고쳐 주려는 부정적인 행동을 오히려 부추긴다고 말하면 부모들이 타고난 권리를 포기하라는 소리처럼 듣고 당혹스러워한다면서, 그만큼 훈육이 양육의 기반이라는 믿음이 깊이 뿌리내려 있다고 해요.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엄격한 훈육을 받은 아이가 스스로를 가장 통제하지 못할 때가 많고요. 사람은 통제받아야 한다는 믿음, 지배 욕구야말로 훈육을 하는 진짜 이유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억울한 아이는 배우지 못해요

아이의 행동을 바꾸려면 철저히 아이 관점에서 접근해야 해요. 혼내고 벌을 줄 때 아이가 어떤 경험을 하고 어떤 감정을 느끼며, 그게 어떤 생각과 결론으로 이어져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야 정말 효과 있는 훈육을 할 수 있어요. 차바리 박사도 아이가 자기 행동의 결과를 인지하고 책임져야 한다는 데는 동의해요. 다만 그 결과가 아이 입장에서 부당하다는 느낌이나 위협을 수반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말해요. 그러면 억울함과 두려움이 앞서서 자기 방어에 급급해질 뿐 진짜로 무언가를 배우거나 느낄 수 없고, 그저 부모를 원망하게 되거든요. "그 행동은 옳지 않다"는 부모의 원래 메시지는 그 과정에서 흐려져요.

책은 이렇게 말해요. 훈육은 합리적이기보다 부모의 기분에 좌우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아이는 언제나 억울함을 느낀다고요. 부모의 요구에 따르더라도 시키니까 할 뿐 속으로는 반발하고, 부모의 역할은 아이 스스로 배우게 하는 것인데 자기 방어에 진을 다 뺀 아이는 배우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요. 그런 상황에서 아이가 생각할 수 있는 건 부모에게 보복하거나 부모에게서 멀리 도망치는 것뿐이고, 결국 훈육으로 얻는 건 아이의 반항적인 행동뿐이라는 거예요.

스스로 반성하고 배우는 것보다 훨씬 쉬운 게 남을 원망하는 거예요. 어른도 부부싸움을 할 때 자기 잘못을 인정하기가 굉장히 어렵잖아요. 상대가 나를 비난하지 않고 자기 감정만 이야기하면(나-대화법이라고 하죠) 불편해도 내 잘못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생각할 수 있어요. 원망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런데 상대가 조금이라도 비난하거나 "앞으로는 그러지 마" 하고 통제하려 들면 원망이 확 불타오르고 자기 방어가 시작되죠. 아이도 마찬가지예요. 책에 나오는 직장 비유처럼, 상사가 훈계하려고 사무실로 부르면 우리는 어떻게 성장할지가 아니라 자신을 보호할 변명만 생각하고, 훈계 뒤에 남는 건 씁쓸함과 줄어든 애사심이에요.

부모가 주는 결과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결과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차바리 박사는 아이가 자기 행동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결과를 경험하게 두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말해요. 핵심은 "자연스럽게"예요. 부모가 아이에게 결과를 지워 주는 게 아니에요. 무섭게 말하든 벌을 주든 부모가 부과하는 결과는 아이 입장에서 굉장히 인위적이고 독단적이거든요. 뜨거운 냄비에 손을 대면 화상을 입는 것처럼 누구나 납득할 수밖에 없는 결과가 아니에요. 뜨거운 냄비를 원망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다미의 사례로 돌아가 볼게요. 소파 위를 맨발로 걸어간 건 잘못된 행동이었죠. 그런데 제가 한숨을 쉬거나 "소파 위를 걸어 다니면 어떡해, 다 엉망이 됐잖아" 하고 화를 내거나, "자꾸 이러면 집에 간다", "오늘 간식 없어", "다시는 식당 안 올 거야" 하고 벌을 줬다면 다미가 "소파 위를 걷지 말아야겠다"는 교훈을 제대로 배웠을까요? 저는 오히려 또 걸어 다닐 가능성이 더 높아졌을 거라고 생각해요. 소파 위를 걷다 넘어지면 어떻게 되는지 배우고 느끼고 자기조절의 동기로 삼을 강력한 기회를 놓쳤을 테니까요.

실제 상황에서 다미는 턱을 부딪혀 아팠고, 큰 소리에 다른 손님들이 불편한 눈으로 쳐다봤고, 덜어 놓은 음식이 망가져 가족들이 불편해졌어요. 그때 다미는 아무도 혼내지 않았는데 스스로 "미안해요"라고 말했어요. 그 상황에서 뭔가 깨닫고 배운 거죠. 중요한 건 그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하는 게 좋았는지 아이가 배우는 것이고, 다미는 자연스러운 결과로 이미 깨달았기 때문에 제가 따로 말할 필요조차 없었어요. 필요했다면 중립적으로 말해 주면 되는 거였고요. 이미 아프고 부끄럽고 당황스러운 상황에서 제가 추가로 혼을 냈다면 저를 향한 억울함과 원망만 남았을 거예요.

책은 "아이가 이런 행동을 하면 어떤 결과를 줘야 하나요"라는 질문 자체가 핵심을 놓친 거라고 해요. 결과는 우리가 주는 게 아니라 상황과 직접 연결된 자연스러운 것이고, 부모가 할 일은 그 결과가 효과를 발휘하도록 두는 것인데 그게 쉽지 않아요. 우리는 교훈을 주는 데 너무 익숙해서 아이가 스스로 깨닫도록 가만히 지켜보는 게 어색하거든요. 인위적인 결과가 효과가 없는 이유는 아이가 납득하지 못해서예요. 벌칙이 아니라 진짜 결과여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늘 역효과가 나서 나쁜 행동은 계속되고 부모 자녀 관계까지 나빠져요.

진짜 권위는 좋은 관계와 합리성에서 나와요

권위 있는 부모가 되겠다는 목표로 아이에게 필요 이상으로 단호하고 무섭게 하는 분들을 저는 많이 봤어요. 진짜 권위 있는 부모가 무슨 뜻인지 한번 깊이 생각해 보셨으면 해요. 아이를 혼내서 권위가 생긴다면 권위 있는 부모 되기, 복종하는 아이 만들기가 얼마나 쉽겠어요. 현실은 그렇지 않아요. 혼내면 혼낼수록 아이는 반항해요. 부모를 미워하게 되기 때문이에요.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간다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죠. 부모는 아이를 혼내야 한다는 오래된 믿음이 우리 육아를 더 어렵게 만드는 셈이에요.

진짜 권위는 아이와의 좋은 관계, 그리고 아이에게 억울함과 원망을 유발하지 않는 합리성에서 나와요. 내키는 대로 결과를 부과하는 사람이 아니라, 아이를 인격적으로 존중하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사람, 아이 입장에서 좋은 사람이어야 진짜 권위를 가질 수 있어요. 어떤 상사, 어떤 선생님의 말을 더 잘 들어주고 싶었는지 떠올려 보시면 돼요. "내가 마음대로 해도 너는 내 결정을 따라야 해, 내가 윗사람이니까"라는 비합리적이고 독단적인 태도는 가짜 권위예요. 이런 독재자에게 아랫사람은 할 수 있게 되는 순간 반항하죠.

책은 부모가 자기 삶으로 진정성을 분명히 드러내면 아이가 "안 돼"라는 말을 받아들여야 할 때 순순히 수용한다고 말해요. 부모가 단지 힘을 과시하려고 그러는 게 아님을 알고, 부모의 기준에 독단적인 면이 전혀 없기 때문에 부모의 결정엔 언제나 확실한 이유가 있다고 믿고 따르게 된다는 거예요. 그럴 때 "된다"는 진짜 초록불이 되고 "안 돼"는 절대적인 정지를 뜻하게 됩니다.

지금 우리 집의 훈육 방식이 내가 어렸을 때 겪은 과거, 문화적인 사상, 남들이 그렇게 말하니까 하는 막연한 생각에서 나온 건 아닌지, 장기적으로 우리 가족에게 정말 유익한 방향이라고 확신하는지 한번 돌아보세요. 새로운 관점을 열린 태도로 받아들여 보시고 우리 집만의 최선의 방향을 다시 도출해 보시길 바라요.

정리해 보면

  • "부모는 아이를 혼내야 한다"는 믿음은 행동주의와 권위주의 시대의 잔재예요.
  • 훈육은 필요해요. 문제는 부모가 정한 결과를 지우는 혼내기와 벌주기예요.
  • 억울하고 두려운 아이는 자기 방어에 급급해 배우지 못하고 부모를 원망해요.
  • 부모가 결과를 주지 말고, 행동에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결과를 겪게 두세요.
  • 진짜 권위는 무서움이 아니라 좋은 관계와 억울함 없는 합리성에서 나와요.